대정전의 밤에 (大停電の夜に)
2005
군대에 있을 때 까만 표지에 마치 그림자처럼 빌딩이 새겨져 있는 책을 읽었다. 제목은 대정전의 밤에, 라는 다소 차갑고 무서운 제목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다 읽는다. 이 책도 그렇게 읽었다.
대단히 따뜻한 소설이었다고 기억한다. 난 이 책을 두번 읽었다.
정전으로 칠흑 같이 변한 도쿄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엎치락뒤치락 전개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뜻한 해피엔딩이 주어진다.
그리고 문득 이 소설이 기억나 검색엔진에 '대정전의 밤에'라고 쳤는데 영화가 있었다. 소설을 쓴 사람과 영화 감독의 이름이 같았다.
난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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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소설은 같았다. 내가 책에서 받았던 느낌 그대로 영화에서 받았다.
정전, 대정전.
한 대도시가 갑작스럽게 정전이 되어 어둠에 감싸인다면 아마 우리가 거기서 받는 느낌은 안온함, 고요함보다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움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영화감독은 갑작스럽게 어둠이 내린 도시를 배경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그려냈다.
유방암으로 내일 가슴절단 수술을 해야 하는 마이코.
천체를 바라보다가 자살하려는 마이코를 발견하는 쇼타.
아내에게 결혼하기 전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듣는 쇼타의 할아버지 요시카즈.
자신이 낳은 아들의 연락을 받는 사요코.
시한부가 선고된 아버지께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 대한 사실을 들은 료타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료타로에게 차인 미스즈.
료타로가 사요코를 찾아간 사이 과거 사랑했던 남자를 찾아가는 시즈에.
시즈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던 기도.
바를 운영하는 기도를 매일 보는 노조미.
5년 만에 출소해서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는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긴지.
긴지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린 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레이코.
크리스마스가 되어 상하이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려는 리동동.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둘 퍼져나가며 혼란스러워야할 것 같은 도쿄를 안온함으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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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너무 많아서 처음 본다면 헷갈릴 수도 있다. 책은 좀 그렇다. 그런데 영화는- 내가 책을 두번 읽고 봐서 그럴 지도 모르지만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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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사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Scene은 두개 있다.
시즈에가 빨간 우산을 쓰고 와서 기도의 바 건물 밖에서 창문 너머로 기도를 바라보다가 살짝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내려오는 장면.
긴지가 자신이 복역하는 동안 레이코가 낳은 아이인 진야에게 산타 변장을 하고 가서 선물을 주고 오는데 진야가 따라나와서 외치는 장면.
"산타 할아버지! 내년에도 오실 거죠?"
정말 눈물나려는데 상도역에서 혼자 MP3 화면 보면서 울 수가 없어서 참았다. 그래도 눈시울이 붉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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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대정전이 내린 밤, 차갑고 혼란스러웠어야 할 것 같았던 밤.
그러나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밤이 지나가는데
우리가 가슴이 시려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있을 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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